[구술63] 중국조선족 해내외 수상자 독창독주음악회 (박장수 편 5)
조글로
길림신문 대형구술시리즈 '문화를 말하다' 63
박장수 편 5
조선족음악예술을 전국과 세계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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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중국조선족교향음악의 발전을 보면 실지는 50년대부터 연변에서 교향음악작품을 연주하기 시작하였고 비교적 정규화되고 일정한 정도로 활동이 경상적으로 된 것은 1982년도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30주년 때부터였어요.
자치주 창립 30주년 경축행사에서 중국음악가협회 연변분회는 년초부터 창작을 틀어쥐고 연변가무단, 연변라지오텔레비죤(예술단)악단, 연변예술학교 70여명 악사들로 중국음악가협회 연변분회 관현악단을 구성하여 관현악 〈나가자 나가자 싸우러 나가자〉(안국민, 박서성 곡), 바이올린독주곡 〈명절의 기쁨〉(권일호 곡) 등 새 작품 6부와 고전작품 6부로 교향음악회를 했는데 이것이 전반 교향음악의 새로운 발전에서 기초를 닦는 역할을 하였어요.
그후부터 악대가 있기에 기념행사나 명절을 계기로 경상적으로 음악작품창작도 하고 여러 가지 형식의 음악회를 조직하였어요.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30돐 기념음악회에서 연주하고 있는 연변음악가협회 관현악단.
1997년 5월 한국음악가협회 회장 김용진, 사무국장 곽재국, ‘예술의 전당’공연계획 부장 박인건이 연변방문기간에 연변음악가협회 관현악단을 한국 제10차교향악제에 초청할 것을 결정하였어요.
우리 조선족음악사에서는 처음으로 되는 대외음악회인지라 상당히 중시를 했어요. 로일대 안국민선생, 최삼명선생, 허원식선생, 최창규선생 등 몇분이 함께 앉아서 주요하게 어떤 종목을 음악회에 내놓겠는가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여러 차례 토론을 벌렸어요. 그때 우리가 생각한 것이 자체창작으로 된 기성작품들에 좋은 것이 적지 않으니 자체창작을 위주로 하는 중국조선족특색의 교향음악회를 내놓자고 했지요.
한국음악가협회 회장 김용진(왼쪽 두번째),사무국장 곽재국(왼쪽 첫사람),‘예술의 전당’ 공연계획부 박인건(오른쪽 두번째)과의 합영.
다른 종목들은 괜찮은데 클라이막스 종목이 마땅치 않았지요. 토론끝에 지구촌 조선민족이 다 익숙히 알고 있는 가요 〈고향의봄〉을 가지고 창작하자고 합의를 보았어요. 그리하여 “안국민선생님이 쓰셔야 하겠습니다.” 하고 부탁을 하니 출국시간이 당장인데 이 짧은 시간에 어떻게 쓰는가고 답답해 했지요. 내가 우스개삼아 “이것은 정치임무이니 꼭 쓰세요.”라고 하니 안국민선생은 웃으시며 끝내 대답했어요.
음악에 추호의 소홀함도 없이 책임성이 강한 안국민선생은 련속 12일간 집안에 붙박혀 바깥세상이 어떤지도 모르고 밤낮 창작하여 기상곡 〈나의 살던 고향〉을 세상에 내놓았어요. 1998년 4월 6일 연변음악가협회 교향악단 일행 75명이 한국음악가협회와 ‘예술의 전당'의 초청을 받고 한국 제10차교향음악절에 참가하여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연변교향악단의 교향음악회를 거행했어요.
음악회에서 관현악 〈장백서곡〉(황기욱 곡), 교향광상곡 〈신기한 장백산〉(박서성 곡), 관현악〈아리랑〉, 박영의 바이올린 독주〈량산백과 축영대〉, 김호윤의 장새납독주 〈처녀총각〉(박서성곡), 〈룡강기나리〉, 기상곡〈나의 살던 고향〉(안국민 작곡) 등을 공연하였는데 음악회는 한국 음악계의 높은 평가와 관중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어요.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하고 있는 연변음악가협회 교향악단(지휘에 최룡국).
특히 안국민선생의 기상곡〈나의 살던 고향〉은 정말 대인기였는데 1분 15초 동안 계속 박수를 받았어요. 음악회가 끝난후 KBS교학악단 등에서 총보를 요구하였어요. 이 작품을 그해 11월달 한국 국제예술절에서 유일한 교향악작품으로 KBS교향악단이 연주하였는데 대환영을 받았지요. 예술절 레파토리 종합해설에서 “이번 공연에서 한가지 아쉬운 점은 우리 작곡사들의 기악 작품이 이와 같은 음악회에서 연주되지 못하고 있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안국민의 〈나의 살던 고향〉이 무척 소중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고 하였어요.
우리는 조선족음악 조직사업에서 창작을 틀어쥐고 우수한 작품과 음악가들의 성과를 좀 더 널리 홍보하고 영향력을 높이기 위해 유일한 성급 분회라는 우세를 리용하여 전국 각종 콩클(콩쿠르)에 직접 추천하는 일에 특히 중시를 했어요.
1999년 9월 중국음악가협회에서 중공중앙 선전부의 위탁을 받고 주최한 ‘공화국 창립 50돐’음악작품콩클(콩쿠르)에서 안국민의 기상곡 〈나의 살던 고향〉, 박서성의 교향광상곡 〈신기한 장백산〉이 영예롭게 최고상인 우수상(6부 중 2부)을 수상하였고 연변음악가협회는 우수조직상을 수상하였어요.
그해 10월 중공중앙 선전부, 국가문화부 등에서 공동주최한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50돐 새 작품음악회에서 교향광상곡 〈신기한 장백산〉을 중국방송교향악단이 연주하였어요.
건당 80돐 중국교향음악회에 참석한 중국음악가협회 주석 부경진(오른쪽 두번째)과 안국민(오른쪽 첫사람),최의광(왼쪽 두번째),박장수(왼쪽 첫사람).
2000년 5월, 우리 나라 음악계의 유일한 전문가대상 제1차 중국음악‘금종상'콩클(콩쿠르)에서 본 회가 추천한 안국민의 기상곡 〈나의 살던 고향〉이 기악곡 동상, 김철학 사 안국민 곡 〈밀림은 푸른바다 나는 갈매기〉와 최현 사 조인길 곡 〈중화의 소나무〉가 성악곡 은상, 한선녀가 성악콩클(콩쿠르) 동상, 박미화가 새작품 노래 특별상을 수상함으로써 수상자 수가 해방군 총정치부, 북경(7), 상해(6), 연변(5) (순위로 나와) 연변이 4위를 차지하였어요. 주당위와 주정부에서는 수상자 표창대회를 열고 수상자를 표창함과 아울러 저에게 2등공을 수여하였어요.
2001년 6월, 중공중앙 선전부, 국가문화부에서 공동으로 주최한 중국공산당 창건 80돐 중국교향음악작품음악회에서 안국민의 기상곡 〈나의 살던 고향〉을 중국교향악단이 연주하였어요. 이처럼 우리 작품이 북경에서 거행된 건국 50돐, 건당 80돐과 같은 중대한 국가예술무대에 올랐다는 것은 아주 영광스러운 큰 성과였어요. 그리고 안국민선생의 기상곡 〈나의 살던 고향〉이 하사크스탄국가교향악단에서까지 공연하다 보니 우리 나라 음악사상 하나의 작품이 3개 국 국가급 교향악단에서 연주한 작품은 내가 알기로는 아직까지 없어요.
그리고 2002년 5월, 제2차 중국음악‘금종상'콩클(콩쿠르)에서 음악사상 처음으로 음악활동가상인 조직상을 특별히 설치하였는데 제가 10명 중 한사람으로 수상하였어요. 2003년 6월, 제3차 중국음악 ‘금종상’콩클(콩쿠르)에서 리영 사 안국민 곡 〈진달래〉, 김철학 사 림성호 곡 〈조국찬가〉가 우수작품상을 수상하는 등 련속 3차나 8개 종목 금종상을 수상하는 알찬 성과를 거두었어요.
주당위와 주정부에서 조직한 제1차중국음악 ‘금종상'수상자 표창대회를 마치고.
제2차 중국음악 ‘금종상'콩클(콩쿠르)에서 박장수가 조직상을 수상,사진은 그 기념메달.
상술한 바와 같이 중국조선족음악연구회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30돐 기념음악회로부터 근 30년간 계획적으로 교향음악사업을 추진하여 큰 성과를 취득하였고 북경과 산재지구 유명한 조선족작곡가들의 작품까지 합치면 훌륭한 교향음악회를 거행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하였어요. 교향음악은 음악에서의 최고차원의 음악으로서 기타 여느 소수민족도 우리와 비할 수가 없어요.
2010년 중국조선족음악연구회는 이 우세를 발휘하여 전국에 교향음악 성과를 홍보하기 위하여 북경에서 교향음악회를 거행하기로 결정하였어요. 그리하여 전국 각지 조선족음악창작골간들에게 통지를 내여 교향작품을 응모하였어요. 북경에서 작품 평의회를 열고 20여부 응모작품 가운데서 10부를 선택하여 중국교향악단 연주로 음악회를 하기로 하였어요.
그런데 음악회 차원을 높이고 영향력을 확대하려면 국가급 단위가 주최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리하여 처음 중국음악가협회 상무부주석 서패동을 찾아가니“이 음악회는 상당한 수준의 음악회여서 지지하고 싶은데 음악협회의 새로운 주석단에서는 대외에 음악회 이름을 걸면 20만원씩 받는 규정이 있기에 국가민족사무위원회에 알아보라.”고 하였어요.
교향음악회 무대에 오른 중국조선족 작곡가들(오른쪽으로부터 안국민 박서성 최창규 최의광 장천일 황기욱 윤명오 우영일 황송철).
국가민족사무위원회 민족문화선전사를 찾아‘보고'를 제출하였어요. 그랬더니 “지금까지 한개 민족 행사에 이름을 건 전례가 없으니 참 어렵다.”고 하였어요. 몇차례 찾아가 반복적으로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연구회가 중국문련 산하이니 문련에서 함께 하면 고려해 보겠다고 하였어요. 음악회 날자를 눈앞에 두고 조급하여 그 길로 중국문련 국내 조직련락부 주임을 찾아가 급한 사정을 말했더니 당장 주임회의를 열고 30분도 안되여 한개 민족 음악회를 주최할 것을 파격적으로 결정하고 급히 비서실에 통지하여 문건을 작성하여 주었어요.그 길로 문건을 가지고 민족사무위원회를 찾았갔더니 련합주최하는 것에 동의하였어요.
2010년은 중국조선족음악사상 특수한 한해였어요. 무석(无锡)심래스석유관제조집단 박룡화 총재는 금융위기의 여파로 극히 어려운 상황에서도 민족음악을 지지하기 위해 서슴없이 90만원 자금을 본회에 후원하였어요. 그리하여 '중국조선족작곡가 수상작품 교향음악회'와 '중국조선족음악문화사출판좌담회'등 대형음악행사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여 우리 나라 음악사에서 두개의 기록을 창조할 수 있도록 받들어주었어요.
교향음악회와 문화사 출판 좌담회를 협찬한 무석심래스석유관제조집단 총재 박룡화.
2010년 10월 10일, 국가민족사무위원회 민족문화선전사, 중국문학예술계련합회 국내 련락부에서 주최하고 중국조선족음악연구회, 중국음악가협회 민족위원회에서 대행한‘중국조선족작곡가수상작품교향음악회'가 중국교향악단의 연주로 북경음악청에서 성황리에 개최되였어요.
당시 전국 정치협상회의 전임 부주석 조남기,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전임 주임 리덕수 등 지도자들과 중국문학예술계련합회 전임 주석 오조강, 중국음악가협회 명예주석 부경진, 비서장 한신안(현임 상무부주석), 한국음악가협회 부리사장 리종일 등 음악계 저명한 인사 그리고 수도 각계 900여명 관객들이 시종 열렬한 분위기 속에서 음악회를 관람하였어요.
음악회에서 안국민의 기상곡 〈나의 살던 고향〉, 허원식의 교향조곡〈아침해 솟았네〉 제3악장〈해란강〉, 최창규의 명상곡〈봇나무〉, 윤명호의 교향음악 〈운〉, 박서성의 바이올린 협주곡 〈장백인상〉, 장천일의 교향조곡 〈운남기상〉제4악장 타가(打歌) 등 10부를 공연하였어요. 이 음악회는 중국가무극원 강금일이 지휘하였고 중국음악학원 교수 김휘가 바이올린독주를 하였어요.
음악회 이튿날 조직된 좌담회에서 수도 음악계 저명한 인사, 음악회 작곡가, 신문보도매체 기자 등 20여명이 참가했는데 그들은 “이번 음악회는 우리 나라 음악사에서 한개 민족이 독립적으로 거행한 첫 교향음악회로서 상당히 성공적이였고 우리 나라 음악계의 성대한 행사이기도 하다.”고 입을 모았어요. 그리고 이번 음악회에서는 "조선족작곡가들의 수준급 교향악작품을 집중적으로 전시함으로써 조선족은 훌륭한 문화전통을 소유한 민족임을 과시하였으며 이 많은 우수한 작품으로 음악회를 조직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북경에서 거행된 중국족선족작곡가수장작품교향음악회 좌담회 전경.
《인민음악》부주필 위경신은 “나는 감히 말하건대 이번 음악회는 최고수준을 갖춘 교향음악회이며 어떤 작품은 당대 교향음악의 최고수준에 이른 작품이다.”라고 말하였어요. 중국음악가협회 명예주석 부경진은 또 “어떤 작품은 북경 뿐만 아니라 국제무대에 내놓아도 손색 없는 훌륭한 작품이다.”라고 하였어요. 중앙음악학원 작곡학부 주임 당건평은 “이처럼 우수한 작품을 올릴 수 있다는 것은 조선민족 만이 해낼 수 있고 또 이러한 성과는 우리 나라 교향악 사업에서 극히 중요하며 중국음악사에서 리정비적인 음악회이다.”라고 높이 평가하였어요. 중앙텔레비죤방송국에서 수차 방송하고 《인민일보》, 《북경일보》 등 수도 매체에서 음악회 소식을 발표하고 북경음악주보사와 민족화보사에서도 대서특필하였어요.
2012년 9월 ‘중국조선족작곡가수상작품음악회’작품 5부와 교성곡 〈장백의 노래〉(김철 사 정진옥 곡) 등을 보충하여 《중국조선족교향음악작품선집》을 편집, 출판하였는데 제3차 중국출판 정부상 도서상을 수상하였어요.
중국조선족음악연구회가 성립된 후 리론사업을 틀어쥠과 동시에 중국조선족음악사 수집정리사업을 시작했어요. 조선족음악은 아주 영광스럽고 찬란한 력사를 가지고 있는데 문화대혁명 때 자료들이 적지 않게 류실되였어요. 그리고 음악력사를 알만한 분들이 년령이 많고 신체가 허약하고 한분씩 세상 뜨는 형편에서 우리 조선족음악문화력사를 보존하기 위해 1999년부터 력사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기 시작했어요.
교향음악회 좌담회에서 기자의 취재를 접수한 중국음악가협회 명예주석 부경진(傅庚辰).
2005년도에 《20세기 중국조선족음악문화》라는 저작을 출판하고 출판기념행사를 하였어요. 그때 제4차중국조선족음악연구회 대표대회를 동시에 하게 되였는데 중국문학예술계련합회 국내 련락부 주임 조장청이 회의에 참가하여 “이 저작은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되는 한개 민족 음악문화사로서 그 영향을 넓히고 기타 민족의 음악력사를 정리하는데 추동역할을 하기 위해 한어로 번역하라.”고 하였어요.
그때부터 6년간의 력사를 보충하여 번역하고 1년 4개월 동안 간고한 편집을 거쳐 5년만에 《20세기 중국조선족음악문화》를 《중국조선족음악문화사》로 제목을 고쳐가지고 2009년에 북경 민족출판사에서 한어로 출판하였어요. 2010년 9월 22일, 또 하나의 소수민족음악기록을 돌파한 음악사를 광범하게 홍보하기 위해 중국음악가협회와 국가민족사무위원회 문화선전사에서 주최하고 중국조선족음악연구회와 민족출판사에서 대행하여 북경에서 출판좌담회를 열었어요.
중국조선족음악연구회 제4차대표대회에서 축하연설을 하고 있는 중국문련 국내 련락부 주임 조장청.
중국조선족음악문화사 출판좌담회 합영(앞줄 왼쪽으로부터 본 회 명예회장 김정평, 중국음악가협회 상무부주석 서패동, 명예주석 부경진, 고문 손신, 국가출판총서 사장 김이천).
모임에 주최단위, 관계부문 지도자 보도매체 등에서 26명이 참가하고 제가 편집출판과정을 보고한 후, 중국음악가협회 명예주석 부경진, 고문 손신(93세), 전직 부주석 겸 당조서기 서패동, 비서장 한신안, 국가민족사무위원회 민족문화사 부사장 왕경부, 중국문련리론연구실 주임 류국강, 국가출판총서 김이천 사장이 연설하였는데 그들은 발언에서 “이 저작은 우리 나라 음악사상 처음 편집,출판한 한개 민족의 음악사로서 그 의의가 크다”. “이미 출판된 음악사는 소수민족 음악을 기록한 것이 적거나 심지어 제기되지도 않았기에 불완전한 중국음악사이고 모종 의미에서 보면 한족 음악사라고 할 수 있다”, “조선족음악문화사 출판은 소수민족음악사의 공백을 메운 중국음악사상 리정비적 저작이다”, “이 저작은 전문 음악총서로서 장절 배치가 타당하고 력사자료가 풍부하며 명사술어사용이 규범화할 뿐만 아니라 문자(行文)가 순통한 등 상당히 수장(收藏)가치가 있는 저작이다.”라고 전면적으로 높이 평가하였어요. 《인민일보》 《북경일보》 《문회보》 등 보도매체에서 소식과 문장을 발표하였어요.
2012년 12월 《중국조선족음악문화사》는 중공중앙선전부에서 선정한 100개 우수도서, 국가출판총서 제3차 ‘100개 원작 출판도서상’을 수상하였어요.
길림신문 글 구성: 김청수 기자/영상 사진: 김성걸 안상근 김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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